수십 년간 굳건한 국방 공조와 자유무역 기조 아래 혈맹으로 불렸던 미국과 캐나다가 이제는 관세 폭탄을 주고받으며 무역 전면전을 벌이게 됐다. 두 나라는 막바지까지 대화를 이어가며 합의점 도출 직전까지 갔으나, 핵심 현안을 둘러싼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결국 등을 돌렸다.
트럼프 행정부는 22일(현지시간) 0시를 기점으로 약 200억달러(약 27조7000억원)에 달하는 캐나다산 수입품에 50%의 관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제재 대상에는 일부 유제품을 비롯해 맥주·와인 등 주류, 하키용품, 기계, 섬유, 시멘트, 가구 등이 포함됐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역시 9월 8일을 기해 미국산 철강, 낙농품, 가전제품, 농기계, 펄프 등을 겨냥해 동등한 규모의 보복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맞대응에 나섰다. 카니 총리는 선제 타격을 당한 이상 이는 전쟁의 서막이라며 초강경 노선을 천명했다. 아울러 미국이 무리한 조건을 내걸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양보한 부분은 극히 미미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협상은 막판까지 상당한 진척을 보였으나, 미국 일부 업계와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등 트럼프 행정부 내 강경파의 반발로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초기 협상 과정에서 양측이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50%에서 25%로,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각각 하향 조정하기로 잠정 합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미국 알루미늄 업계가 원자재에 대한 관세 장벽을 낮추더라도 가공품에 매기는 50% 관세율은 유지해야 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러트닉 장관 또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며 특정 품목 관세에 대해 완고한 태도를 고수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동차 부문 역시 난항을 겪었다. 캐나다 측은 미국산 부품에 한정된 관세 환급 조치를 북미산 전체로 확대 적용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여기에 미국이 막바지 조율 단계에서 중·대형 트럭을 관세 인하 품목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 간 마찰이 극에 달했다.
캐나다 정부가 반발한 것은 관세 문제만이 아니었다. 카니 총리는 미국이 막바지에 이르러 캐나다의 프랑스어 문화 보호 정책을 무력화하고 제3국과의 통상 교섭을 통제하려는 무리한 요구를 들이밀었다며, 이는 노골적인 주권 침해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이번 협상 결렬은 그동안 쌓여온 양국 간 불화를 여실히 드러낸다. 미국과 캐나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국경선을 맞대고 북미 경제권을 긴밀하게 연결해 온 핵심 파트너다. 양국의 기업 생태계와 산업 공급망이 국경을 초월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기에, 철강이나 자동차 등 일부 업종에서 촉발된 관세 분쟁이 양국 경제 전반을 뒤흔들 뇌관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압박을 넘어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州)'로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 폈다. 나아가 캐나다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미국의 덕분이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에 캐나다 전역에서는 반미 감정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미국행 발길을 끊고 미국산 제품을 불매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으며, 급기야 주캐나다 미국 대사를 추방하자는 서명 운동까지 등장했다.
카니 총리는 지난해 3월 취임 때부터 대미 경제 종속을 탈피하고 교역 다변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중앙은행 총재 출신인 그는 1월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미국이 더는 국제 사회의 안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며 캐나다를 비롯한 중견국들이 연대해 경제적 외풍에 맞설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카니 총리는 22일에도 미국이 기존의 통상 질서를 뒤엎고 최우방국마저 관세의 표적으로 삼아 경제적 결속을 무기화하려는 의도를 일찍이 간파했다고 언급하며, "미국의 서명은 언제든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연필 자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불리한 조건의 타협안은 수용하지 않겠다는 카니 총리의 결단은 캐나다 국내에서도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여론조사 업체 레제 마케팅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캐나다 성인의 56%가 자국 정부가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미국에 더 이상 양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응답했다. 스콧 모 서스캐처원주(州) 총리는 현상 유지는 더 이상 선택지가 될 수 없다고 밝혔고, 제이슨 케니 전 앨버타주·총리 또한 끊임없는 정치·경제적 압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카니 총리의 행보에 힘을 보탰다.
이번 사태를 두고 뉴욕타임스(NYT)는 카니 총리가 협상을 결렬시킴으로써 미국의 핵심 우방국 중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길로 들어섰다고 분석했으며, AP통신은 무역전쟁의 여파로 한때 끈끈했던 동맹의 근간이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캐나다 맥길대 다니엘 벨랑 교수는 AP통신에 "이번 관세 협상 파행은 과거의 캐나다·미국 관계가 사실상 막을 내렸음을 암시한다"며 "수많은 캐나다인에게 트럼프 행정부는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인식을 깊이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고 짚었다.
미국 측도 물러설 기색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려 캐나다가 미국의 주(州)로 편입될 생각은 없으면서 그에 상응하는 혜택만 누리려 한다고 비난하며, 캐나다가 오랜 세월 미국 농민들에게 가혹한 관세를 매겨온 행태를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역시 22일 캐나다의 보복 관세에 맞대응할 후속 조치를 준비 중이라며, 향후 캐나다와의 새로운 협상 테이블은 마련돼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